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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오마이뉴스_베를린 소개서

08 분단의 틈 사이에서 피어난 오두막/ Baumhaus an der Mauer

by 도시관찰자 2019. 4. 24.

* 기사 전 서문은 기고 당시 개인적인 생각이나, 기사에 대한 반응에 대해 적어놓았던 글입니다.

불법이라는 말은 때로는 너무나도 불편한 말이다. 불법 점거 혹은 불법 점유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불법이란 한 사회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규칙과 법을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불법적인 행동을 저지르기도 한다. 모순적이지만 인간의 삶이란 항상 그런 것 같다. 법이라는 게 항상 정말 그 사회의 삶의 방식을 정확히 규율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악법을 철폐하고, 규제를 철폐하는 일 역시도, 꼭 다수의 정의를 위한 행동이 아닐 수도 있고, 누군가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법을 변화시키는 경우 일 때도 허다하다.

인간다운 도시를 꿈꾼다. 규제를 풀어 골목 상권까지 장악하려는 대기업보다는 길거리에서 불법으로 노점상하는 소시민들을 위하는 사회 말이다. 이 글은 가진 이들이 더욱더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을 꾸려나가며 소수가 특별해지는 사회보다는, 평범한 시민들의 독특한 혹은 다양한 행동이 인정받고 때로는 그로 인해 평범한 시민, 이웃 사회 그리고 도시가 특별해질 수 있음을 소개하는 글이다.

비슷한 맥락의 글이 하나 있는데,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의 '[세상 읽기] 신호등 안 지키기'라는 기사이다. 사소한 법을 어기라는 것은 정말로 그냥 대책 없이 불법을 저지르라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것은 암묵적인 사회의 규칙이 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게 행동하라는 뜻이고, 그를 통해 시민들의 주도하에 법을 변화시키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란 원래 법 바깥에 있다. 대의제민주주의의 핵심기관인 의회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법의 제정 또는 그 개폐인 것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이 늘 유동적이어서 그것을 그때그때 정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항상 이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며 그런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 (후지이 다케시 2014) 정말 기가 막힌 문장이다.

* 오마이 뉴스 기사 원문 주소: http://omn.kr/bqcx

 

대 이어 '불법' 점유했는데... 너도나도 잘했다?

[베를린 소개서 08] 베를린 장벽의 나무집

사진 1.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을 기념하는 빛의 경계 행사 하얀 풍선은 장벽이 있던 자리를 상징한다.

베를린이 특별한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국가의 분단이라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만들어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장벽이 한 도시를 나누고, 두 개로 분리되고 그리고 다시금 그 장벽이 시민들의 손에 허물어져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한창 도시 마케팅이 유행처럼 일던 21세기 초 세계의 그 어떤 유명 도시들도 가질 수 없었던 독보적인 도시 홍보 소재로 줄곧 활용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 역사적인 사건을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 베를린을 찾았다.

통일 이후 장벽으로 인해 버림받았던 땅은 하나, 둘 개발이 되기 시작했고, 장벽은 관광지이자 동시에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큰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모형 장벽이 만들어져서 기념품으로 판매되고, 장벽 조각은 그럴싸한 포장과 진품 증명서와 함께 비싼 가격에 팔리기 시작했다. 베를린 여행의 필수 목적지인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 체크 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 그리고 베르나우어 거리(Bernauer Straße) 일대에는 매일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장벽 혹은 기념비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2014년 11월 7일부터 9일까지,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을 맞이하여 베를린 시는 빛의 경계(Lichtgrenze)라는 특별한 행사를 선보였다. 장벽이 있던 자취를 따라 약 8,000개의 LED 풍선을 설치하고, 마지막 날에는 하늘로 풍선을  날려 보내는 행사였다. 행사가 진행되는 3일간 사람들은 한결 더 편리하게 장벽의 자취를 따라 분단된 도시였던 베를린을 거닐었다.

이번에 소개할 이야기는 한 노인이 불법으로 농작을 시작해 이제는 아들이 대를 이어나가고 있는 베를린 장벽에 접한 한 도시농업 공간이다.

 

지도 1. '검은 선'은 실제 장벽이 지어진 개략적인 위치를 의미하고, '빨간 선'은 실제 동 베를린의 영토를 의미한다. 두 선 사이의 공간이 Osman Kalin씨가 농작을 한 곳이다. (OpenStreetMap 수정) ⓒ OpenStreetMap

서 베를린에서 대규모의 건물점거운동(Squat)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83년, 베를린 장벽 근처에 살던 서 베를린의 터키계 이주민 오스만 칼린(Osman Kalin)씨는 삼각형 형태의 교통섬으로 쓰레기만 쌓이고 있던 땅을 치우기 시작한다.

쓰레기를 정리한 그는 땅에 농작물을 심기 시작했다. 토마토, 오이, 마늘, 양파, 콩 등 수많은 작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또한 잡동사니들을 가지고 와서 철조망을 만들고, 일층짜리 작은 오두막도 지었다.

장벽 주변으로는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았기에 그 땅을 이용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오두막은 그가 원하는 만큼 크게 지을 수 없었다. 장벽의 높이보다 높은 것을 동독 군인들이 금지했기 때문이다.

왜 동독 군인들은 서 베를린 주민이 서 베를린 땅에서 하는 일을 금지했을까? 그 이유는 오스만씨가 농작을 하기 시작한 장소 탓이다. 그 땅은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던 당시 동독 정부가 건설상 편의와 비용절감을 위해 장벽 밖 서 베를린 쪽으로 넘겨놓은 땅이었다. 동 베를린 입장에서는 장벽 밖에 있지만 자신들의 땅이고, 서 베를린의 입장에서는 장벽 안에 있지만 자신의 땅이 아닌 그야말로 '그 누구의 땅도 아닌 곳(Niemandsland)'이었다.

 

사진 2. 베르나우어 거리의 장벽 기념 공원에 표시되어있는 피난굴의 자취

장벽을 지키고 있던 동독 군인의 입장에서 오스만 씨가 그 땅을 경작하고 활용하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땅을 파서 동독 주민들의 피난 굴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르나우어 거리 일대에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건너오기 위한 피난 굴의 자취가 장벽 기념 공원 위에 표시되어 있기도 하다.

놀랍게도 그는 동독 독일통일사회당(SED)의 중앙위원회로부터 이 땅을 사용해도 된다는 공식 허가를 받게 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조그마한 도시 농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공식 허가에는 한 가지 예외가 있었는데, 장벽보다 높게 자라서 군인들의 시야를 가리는 해바라기와 같은 식물은 키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진 3. 오스만 씨의 2층 오두막 1991년 2003년 두 번의 화재 이후 오두막은 새로 지어진 상태이다.

통일 전까지 오스만 씨는 여러 작물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독일의 통일은 그의 도시 농업에 큰 차질을 빚게 만든다. 그동안 동 베를린에도 서 베를린에도 외면받던 땅이 베를린이라는 한 도시의 온전한 관리 하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장벽 때문에 높일 수 없었던 오두막을 2층으로 증축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장벽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동 베를린과 서 베를린이 가르던 땅은 이제 베를린의 두 지역 관청이 가르는 땅이 되었다. 동독의 땅이었던 곳은 미테(Mitte) 지역 관청의 지역 관청의 땅이고 서독의 땅이었던 곳은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지역 관청의 관리 대상이었다. 미테 지역 관청은 오스만 씨에게 불법으로 점거한 그 땅을 떠나라고 요구하였다.

 

사진 4. 오스만 씨의 도시농업 공간

훗날 크로이츠베르크 연대기 작성 작업 중 오스만씨는 통일 전 군인들이 처음 자신의 집을 찾아왔던 때를 이야기했다.

"두 명의 군인이 소총을 들고 나에게 찾아와, 내가 그 땅에 뭘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땅이 누구의 소유인지를 물었다. 그때 나는 '내 땅이오!'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그 땅은 너의 땅이 아니라, 동독의 소유지다!'라고 말했고, 나는 그에 다시 응하며, '내가 여기 있는 한은 그럴 수 없다(내 땅이다)'라고 말했다." (노이에스 도이칠란드, 마틴 크뢰거, 2010년 10월 2일 기사 참조)

총을 들고 집 앞으로 찾아온 군인들에게까지 당당히 자기의 땅이라고 주장했던 그는 지역 관청의 요구에 불응하고 땅을 떠나지 않았다. 또한 이웃, 지역주민, 지역 성당 그리고 나아가 크로이츠베르크 지역 관청까지 오스만 씨와 그가 불법 점거한 땅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 장소는 단순히 불법 점거된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가 싹트고, 이웃 공동체가 만들어진 장소였기 때문이다.

2004년 오스만씨가 점거한 땅의 소유권은 미테 지역 관청으로부터 크로이츠베르크 지역 관청으로 이전된다. 또한 그의 불법 점거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준 당시 크로이츠베르크 구청장인 프랑크 슐츠의 덕택으로 그 땅을 계속 농작지로 활용해도 된다는 특별사용 동의서를 받게 된다.

 

사진 5. 오스만 씨의 2층 오두막

오스만 씨는 2007년 이래로 병으로 더 이상 오두막과 농작물을 가꾸지는 못한다. 대신 그의 아들 메흐메트 칼린(Mehmet Kalin)씨가 대를 이어나가고 있다. 칼린 가족의 나무집과 농업 공간은, 베를린 장벽의 자취를 따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하나의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여행객들이 쉽게 들어가고 싶은 느낌이 드는 곳은 아니지만, 오두막에는 누구나 쓸 수 있는 자그마한 공동 주방과 화장실이 있다. 그리고 오두막 앞에는 벤치가 놓여있고, 그곳에서 직접 키운 작물로 만든 상품을 판매하기도 한다. 분단의 틈을 활용해 불법 점거한 땅을 도시 농업 공간으로 활용하고, 특별 허가까지 얻어내며 대를 이어가고 있는 베를린 장벽의 나무집(Baumhaus and der Mauer)은 삭막한 아스팔트 사이에 피어난 꽃처럼 도시 속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참조

http://www.berlin.de/mauerfall2014/

https://www.youtube.com/watch?v=vv3OsL_Tujs

http://www.berlinstreet.de/8302

http://www.neues-deutschland.de/artikel/180940.garten-im-schutz-der-mauer.html

http://www.faz.net/aktuell/gesellschaft/menschen/berlin-der-kreuzberger-guerrilla-garten-1409414.html

http://www.faz.net/aktuell/gesellschaft/menschen/berlin-der-kreuzberger-guerrilla-garten-1409414-p2.html

http://www.hani.co.kr/arti/SERIES/56/66570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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